[판례로 보는 세상] '정신병력 숨긴 결혼' 혼인취소 사유

대구가정법원 상주지원 2017드단5471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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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간혹 특별한 사정을 알았다면 혼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혼 아닌 혼인 무효나 취소를 주장하는 의뢰인을 접한다. 혼인관계증명서 등에 혼인, 이혼의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혼소송도 합리적인 주장과 명확한 입증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승소할 수 있는데, 혼인의 무효나 취소를 구하는 것은 일반적인 이혼소송보다 까다롭다.

민법은 혼인의 무효 또는 취소 사유를 규정하고 있다. 민법 제815조는 혼인무효 사유로 ‘당사자 간 혼인의 합의가 부존한 때’와 ‘당사자 사이가 근친일 때’를 규정하고 있다.

민법 제816조는 혼인취소 사유로 △만 18세가 되지 않은 미성년자가 혼인한 경우 △미성년자나 피성년후견인처럼 혼인에 동의가 필요한 자의 동의없이 진행된 혼인 △근친혼 △중혼 △혼인 당시에 부부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악질(惡疾) 기타 중대한 사유가 있음을 알지 못한 경우 △사기 또는 강박으로 혼인을 한 경우를 규정하고 있다.

법원은 통상 재산 사항, 경제적 능력, 학업, 집안 내력 등과 같은 사정에 대한 기망은 혼인의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고 본다. 혼인 후 위와 같은 기망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혼인 취소가 아닌 이혼에 의하여 혼인관계를 해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경향이다. 그런데 만약 혼인 전 정신병력의 존재를 숨긴 경우 혼인의 취소가 인정될 수 있을까? 아래 사례를 살펴보자.

2. 사실 관계

외국인인 피고는 2010년경 관광비자로 한국에 들어와 공장 등에서 생활을 하던 중 남자친구와의 문제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에 엉뚱한 소리를 하고 웃는 모습을 하며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는 등 정신병을 앓았다. 그는 2012년 4월 정신병원에서 기타 급성 및 일과성 정신병 장애 진단을 받고 한 달 간 입원해서 약치료를 받았다. 그 후 피고는 모국으로 돌아갔다.

원고는 전 처와 이혼한 후 혼자 지내고 있던 중 2016년 11월 한국에 거주하며 한국국적을 취득한 피고 친언니의 주선으로 피고를 소개받았다. 원고와 피고는 2016년 11월 결혼식을 치른 다음 2017년 1월 혼인신고를 마쳤으며, 피고는 2017년 4월 한국에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피고나 그의 친언니는 피고가 정신병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한국에 입국한 피고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웃는 모습을 하며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원고를 외면하는 등 증상이 나타났다. 이에 피고는 2017년 5월 두 차례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피고의 상태는 심각했으며, 원고는 그 무렵에서야 그의 정신병력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원고는 이혼보다는 혼인의 취소를 원했다. 이에 혼인 취소 및 위자료 청구 소송이 제기됐다. 원고는 “피고는 상세불명의 급성 및 일과성 정신병 장애로 치료받은 전력이 있고 위 병증은 재발이 가능한 것임에도 원고에게 이러한 사실을 숨긴 채 혼인을 하였다”며 “피고의 정신병 전력은 원고가 피고와의 혼인의사를 결정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라 할 것인데 피고는 이에 대하여 원고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원고가 이러한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 사건 혼인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되므로, 이러한 피고의 행위는 혼인 여부의 결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실에 대한 기망행위로써, 민법 제816조 제3호 소정의 혼인취소 사유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재판부는 어떻게 판단하였을까.

3. 판결 요지

가. 혼인 취소에 관하여

민법 제816조 제3호에서 혼인취소의 사유로 규정한 ‘사기’에는 혼인의 당사자 일방 또는 제3자가 적극적으로 허위의 사실을 고지한 경우 뿐만 아니라 소극적으로 고지를 하지 아니하거나 침묵한 경우도 포함되고, 사기로 인하여 혼인이 취소되기 위해서는 사기로 인하여 생긴 착오가 일반적으로 사회생활관계에 비추어 볼 때 혼인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당사자가 그러한 사실을 알았더라면 혼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인정되는 경우여야 한다(대법원 2016. 2. 18. 선고 2015므654, 661 판결, 대법원 2007. 10. 25. 선고 2007므1058 판결 참조).

살피건대, 혼인은 남녀가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의, 인내로써 상대방을 이해하고 보호하며 일생의 공동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법률상, 사회생활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신분상 계약으로서 그 본질은 양성간의 애정과 신뢰에 바탕을 둔 인격적 결합에 있다. 혼인 당사자 일방의 정신적인 질환은 그 정도에 따라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의를 쌓아가고 이를 유지하는 데 중대한 장애가 될 수 있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혼인의 당사자가 혼인의사를 결정함에 있어 중요하게 고려하는 사항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피고는 정신병으로 치료받은 전력이 있고, 위 병증이 재발되어 현재도 치료가 필요한 상황임에도 원고에게 이러한 사실을 숨긴 채 혼인을 하였는 바, 원고가 위와 같은 사실을 알았다면 피고와 혼인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봄이 상당하다.

따라서 원고는 피고의 기망행위로 인하여 피고의 상태를 재대로 알지 못한 채 혼인의 의사를 표시하였다고 할 것이므로, 이는 민법 제816조 제3호에서 정한 혼인의 취소사유인 ‘사기로 인하여 혼인의 의사표시를 한 때’에 해당한다. 따라서 원고와 피고 사이의 혼인은 취소되어야 한다.

나. 손해배상 청구에 관하여

피고의 기망행위에 따라 혼인이 취소되어 원고가 정신적 고통을 받았을 것임은 경험칙상 명백하므로, 피고는 원고가 받은 정신적 고통을 금전으로나마 위자할 의무가 있다. 피고의 기망행위의 내용, 원고가 피고의 기망행위를 알게 된 경위, 원고와 피고의 나이와 직업, 워고가 혼인과정에서 지출한 비용 등 여러 사정을 참작하여 볼 때 위자료 액수를 2,000만원으로 정함이 상당하다.

4. 판결의 의의

재판부는 정신병력을 숨긴 피고의 기망행위를 인정하고 이는 혼인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인정하여 혼인취소 판결을 하였다. 위자료 액수로 원고가 혼인과정에서 지출한 비용 등을 감안하여 2,000만원으로 결정하였다.

이와 유사한 결론을 내린 하급심 판결도 있다. 부산가정법원(2015드합200299 판결)에서는 “부부 중 일방이 정신분열증 전력을 숨기고 결혼을 한 뒤 정신분열증이 재발하자 혼인취소를 인정”하였고, 2005년 대구가정법원에서는 “양극성 장애 전력을 숨기고 결혼한 뒤 재발하자 혼인 취소를 인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을 보면 정신병이 다시금 재발하는 정도에 이르면 혼인 취소사유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대법원은 “출산 경력을 숨긴 것이 혼인취소사유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관하여는 “당사자가 성장과정에서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아동성폭력범죄 등의 피해를 당해 임신을 하고 출산까지 하였으나 이후 자녀와의 관계가 단절되고 상당한 기간 동안 양육이나 교류 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라면, 출산의 경력이나 경위는 개인의 내밀한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서 당사자의 명예 또는 사생활 비밀의 본질적 부분에 해당하고, 나아가 사회통념상 당사자나 제3자에게 그에 대한 고지를 기대할 수 있다거나 이를 고지하지 아니한 것이 신의성실 의무에 비추어 비난받을 정도라고 단정할 수도 없으므로, 단순히 출산의 경력을 고지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것이 곧바로 민법 제816조 제3호에서 정한 혼인취소사유에 해당한다고 보아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이는 국제결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고 판시한 바 있다.
“단순히 상대방의 혼인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정만을 들어 일률적으로 고지의무를 인정하고 제3호의 혼인취소사유에 해당한다고 하여서는 아니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분명, 민법 제816조 제3호가 규정하는 ‘사기’에는 혼인의 당사자 일방 또는 제3자가 적극적으로 허위의 사실을 고지한 경우뿐만 아니라 소극적으로 고지를 하지 아니하거나 침묵한 경우도 포함된다.

그러나 불고지 또는 침묵의 경우에는 법령, 계약, 관습 또는 조리상 사전에 그러한 사정을 고지할 의무가 인정되어야 위법한 기망행위로 볼 수 있다. 관습 또는 조리상 고지의무가 인정되는지 여부는 당사자들의 연령, 초혼인지 여부, 혼인에 이르게 된 경위와 그때까지 형성된 생활관계의 내용 등 구체적·개별적 사정과 더불어 혼인에 대한 사회일반의 인식과 가치관, 혼인의 풍속과 관습, 사회의 도덕관·윤리관 및 전통문화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

5. 나가며

‘정신병력을 숨긴 것’과 ‘출산경력을 숨긴 것’은 그 자체로 구분돼야 할 차이가 있다. 하지만 혼인취소 사유가 되는지에 대한 판단은 구체적 사안마다 개별적으로 사실관계와 그 중요성을 자세히 탐문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진=남광진 변호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