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청문회 쟁점된 ‘사노맹’...어떤 단체였나

조국, 사노맹 방계조직 '사회주의 과학원' 멤버...집행유예 선고

사노맹은 '자생적 사회주의자의 혁명투쟁조직'... 대법, 지난 91년 '반국가 단체'로 판결

'북한'을 제외하면 유일한 '반국가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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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사노맹’ 사건이 26년만에 재조명을 받고 있다. 조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1993년 울산대 교수로 근무할 당시, 사노맹의 방계조직인 ‘사회주의 과학원’에 소속으로 활동한 혐의로 검거,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사노맹은 무장투쟁과 사회주의 민중공화국 수립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대법원에서 ‘반국가 단체’로 지목이 됐지만 ‘사회주의 과학원’은 학술단체에 불과하다는 점 때문에 ‘이적단체’가 되는데 그쳤다. 구성원에 대해서도 사노맹은 무기징역~징역10년형이 선고된 반면, 사회주의 과학원은 대부분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오히려 단지 ‘사회주의 연구’라는 이유로 학자들의 연구를 가로막고 연구자들을 투옥까지 했다는 점에서 국제앰네스티 등 인권단체들은 이들을 양심수로 선정하기도 했다.

사노맹 주동자 박노해 시인이 쓴 시 '내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의 일부분[사진=장용진 기자]


▲남로당 이후 최대 혁명조직

사노맹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약칭으로 서울대 제적생인 백태웅과 ‘얼굴없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 등이 주축이 돼 결성된 조직이다. PD(민중민주)계열로 알려져 있지만 자신들은 ND(민족민주)계열이라고 불렀다.

사노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반국가단체 수괴’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백태웅씨는 1989년 ‘노동해방문학’에 ‘이정로’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논문을 통해 사노맹의 결성으로 인해 당시 한국사회 운동권은 NL(민족해방):PD:ND 등 세가지 노선으로 정립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학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가장 대중적인 활동을 벌였던 NL이 ‘주체사상’의 원리에 따라 전위정당을 만들려 하지 않았고, NL에 맞설 정도의 활동가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여러 개의 조직으로 분산된 PD가 전위정당을 만들 수 없었던 것에 비해 ND계열은 자신들만의 전위조직을 가질 능력과 조직, 사상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사노맹이다.

원래는 CA(제헌의회)계열이었지만 다수파가 NL로 넘어가 버리자 남아있던 소수파가 세력을 재정비해 만든 것이 사노맹이고, CA의 전술론을 가다듬고 발전시켜 만든 것이 NDR이라는 분석도 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국정원의 전신)의 수사에 따르면 사노맹은 1988년 준비위원회 결성을 시작으로 차곡차곡 활동범위를 넓혀왔다. 그리고 마침내 1989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사노맹 출범 선언문’이 배포되면서 공식활동에 들어갔다. 안기부는 사노맹의 조직원이 한때 3000명에 이르기도 했다며 ‘남로당 이후 최대 조직’이라고 밝혔다.

1991년 당시 안기부가 제시한 사노맹 사건 증거물. 자살물 독극물은 포함돼 있지 않다[사진=구 안기부 제공 ]


▲“가라, 자본가 세상. 쟁취하자, 노동해방”

사노맹의 목표는 ‘민중의 봉기를 통해 자본주의 질서를 철폐한 뒤 민중공화국을 수립해 사회주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평화시위로는 이 같은 목표가 달성될 수 없으니 민중의 무장봉기가 필요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노동자 전위정당을 결성하고 그 노동자 전위정당이 주도하는 민중통일전선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자본주의 정부를 몰아낸 뒤 민중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또한, 그렇게 만들어진 민중공화국은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국가여야 한다는 것이 사노맹의 생각이었다. .

사노맹의 중앙위원이었던 ‘노동자 시인’ 박노해(본명 박기평)는 ‘마지막 시’라는 작품에서 “한 노동자의 최후의 사랑과 적개심으로 쓴/지상에서의 마지막 시/마지막 생의 외침/아 끝끝내 이 땅 위에 들꽃으로 피어나고야 말/내 온 목숨 바친 사랑의 슬로건...가라 자본가세상, 챙취하자 노동해방”라고 쓰기도 했다.

이 시는 박 시인이 안기부 지하 조사실에서 조사를 받다 고문을 견디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하고 유서처럼 쓴 시로 알려져 있다.

안기부는 과거의 시국사건들과 달리 사노맹은 스스로 ‘사회주의자’이자 ‘혁명가’라고 밝혔고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어 ‘자생적 사회주의 혁명조직’이라고 규정했다.

이 같은 안기부의 수사결과는 법원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통상 다른 시국사건들이 ‘북한’이라는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이적단체’ 혐의로 처벌된 것과 달리 사노맹 관련자들은 모두 ‘반국가 단체 구성’ 등의 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법적인 지위로 따지자면 북한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같은 당시 노태우 정권의 평가는 상당 부분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증거물들을 살펴보면 실제 사노맹의 능력이나 의사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1992년 사노맹 사건으로 재판을 받을 당시의 박노해[사진=연합뉴스]


▲자살용 독극물 캡슐을 만든 이유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12일 “사노맹은 무장봉기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 달성을 목표로 폭발물을 만들고 무기탈취 계획을 세웠으며, 자살용 독극물 캡슐까지 만들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런 조직에 가담했던 인물이 어떻게 법무부 장관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사노맹이 무기를 탈취하거나 폭발물을 만든 적은 없다. ‘무장투쟁을 할 때가 되면 그런 준비도 해야되지 않겠냐’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수준이었을 뿐 구체적인 계획수립 단계로 나간 것도 아니었다.

민중들의 투쟁이 시작되면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대가 들어와 5.18광주항쟁처럼 살인진압을 할텐데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 사노맹이 생각한 ‘무장투쟁’의 이유와 수준이었다.

독극물 캡슐 역시 안기부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해 더이상 견디기 어려울 때 쓸 목적으로 준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최종적으로 제조에는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박노해 등에 따르면 당시 안기부는 옷을 모두 벗긴 채 몽둥이 찜질을 한 것은 물론 성기를 때리는 등 모욕감과 자괴감을 견딜 수 없도록 만드는 고문방법을 썼다. 이 때문에 함께 구속됐던 은수미 성남시장은 감옥에서 대장과 소장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해야 했고, 박노해처럼 자살을 기도한 경우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