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낭기의 관점]"박원순 언동은 성희롱" 인정한 인권위, '죽어가던 법'을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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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2-02 12:53
수정 : 2021-02-02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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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1월 25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여비서에게 한 성적 언동은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발표했다. 국가 기관이 박 전 시장의 성폭력을 인정한 것은 처음이다. 인권위 발표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 사건과 관련해 우리 사회에서 ‘죽어가던’ 법을 그나마 살렸기 때문이다. 인권위가 제 역할을 다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원순 성추행 사건 피해자는 작년 7월 박 전 시장을 고소하면서 변호인을 통해 “거대한 권력 앞에서 힘없고 약한 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었습니다”라고 호소했다. 고립무원에 빠진 자신이 그래도 의지할 수 있는 곳은 법뿐이라는 한가닥 기대와 절박함이 담긴 말이었다. 이 말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법은 과연 피해자를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인지에 많은 사람들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인권위, "박원순, 성적 굴욕감·혐오감 느끼게 해"

그러나 피해자가 고소한 이후 서울시는 물론이고 경찰도,여성가족부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여권 인사들과 친문재인 네티즌들은 오히려 피해자를 조롱하고 핍박하며 2차 피해를 가했다. 청와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우리 사회에서 법은 ‘죽어가고 ‘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권위 발표가 나온 것이다.

인권위는 “9년 동안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임하며 차기 대권 후보로 거론되는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박 전 시장이 하위직급 공무원에게 행사한 성희롱”이라고 발표했다. 인권위는  박 전 시장이 늦은 밤 피해자에게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이모티콘을 보낸 점, 집무실에서 네일아트한 피해자의 손톱과 손을 만진 점 등을 사실로 인정했다. 피해자가 시장의 일정 관리 같은 보좌 업무 외에 샤워 전・후 속옷 관리, 약을 대리 처방 받거나 복용하도록 챙기기, 혈압 재기 및 명절 장보기 등 사적 업무를 수행한 점도 사실이라고 봤다.

인권위는 피해자의 휴대전화 디지털 포렌식 자료, 참고인 51명의 진술, 피해자 진술 등 객관적인 자료를 근거로 “박 전 시장의 행위는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성적 언동으로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했다. 인권위는 “피조사자인 박 전 시장의 진술을 듣기 어렵고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라 사실 관계를 더 엄격히 따졌으나, 성희롱으로 판단하기 충분하다”고 했다.

인권위는 “박 전 시장은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서울대 교수 조교 성희롱 사건 등 여성 인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의 공동 변호인단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젠더(gender·성) 정책을 실천하려 했기에 그의 피소 사실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고 했다. 이 사건에 대한 인권위의 평가가 담겨 있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인권위가 ‘성추행’이 아닌 ‘성희롱’이라고 해서 수위를 일부러 낮춘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인권위법에 따른 용어 선택일 뿐이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성추행 대신 성희롱이라는 표현을 쓴다. 제2조에 성희롱을 ‘공공기관 종사자가 그 직위를 이용해 성적 언동으로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정해 놓았다. '언동’은 말과 행동이다. 행동이라는 말 속에 ‘추행(더럽고 지저분한 행동)’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민주당 "피해 호소인" 호칭···2차 가해도 묵인

인권위 발표는 작년 7월 피해자가 인권위에 직권조사를 의뢰한 지 6개월 만에 나왔다. 그 사이 피해자에겐 어떤 일이 벌어졌나? 민주당은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이라고 불렀다. 민주당이 다른 성추행 사건에서 ‘피해 호소인’이라고 한 적은 없다. 유독 박 전 시장 사건에서만 그런 표현을 썼다. 이 사건의 본질을 흐리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민주당은 당 지지자들이 2차 피해를 가해하는 것도 묵인했다. 일부 의원들은 피해자 뒤에 정치적 배경이 있는 듯한 ‘음모론’을 펴기도 했다.

여성가족부는 어땠는가. 피해자 지원단체와 공동변호인단은 2차 가해가 계속되자 작년 10월과 12월 두 차례 여성가족부에 2차 피해 차단과 재발 방지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여성폭력방지기본법 18조 3항은 ‘국가와 지자체는 2차 피해가 발생한 경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 측은 여성가족부로부터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성폭력 피해자가 굉장히 많은데 중앙부처가 개별 피해자들을 일일이 지원해야 하는지는 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여성가족부는 어떤 성폭력 사건에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만, 특히 고위공직자가 부하 직원에게 저지른 공직 사회의 성폭력 사건에는 더욱 엄격히 나서야 한다. 공직 사회의 성폭력 사건부터 바로잡아야 민간 영역에서 발생한 사건에도 엄정히 대처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성가족부는 박원순 성추행 사건을 ‘굉장히 많은 사건 가운데 하나’쯤으로 몰고갔다. 여성가족부는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부터 피해자를 ‘고소인'으로 부르고, 제대로 된 입장도 내놓지 않았다.

여성가족부는 뒷짐, 경찰은 '무혐의' 처리


서울경찰청은 작년 12월 29일 박 전 시장의 강제추행, 시장 주변인들의 추행 방조 혐의를 확인하지 못했다며 수사를 종료했다고 발표했다. 5개월 넘게 수사하고도 빈손으로 끝낸 것이다. 이에 앞서 작년 12월 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1부(부장판사 조성필)는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는 판결을 했다. 박 전 시장 성추행 사건 피해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전직 서울시장 비서실 직원에게 징역 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면서 내린 판결에서였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원인에 대해 판단하는 과정에서 박 전 시장이 피해자에게 성적인 문자와 속옷 사진을 보냈고, ‘냄새를 맡고 싶다’ ‘몸매 좋다’ ‘사진 보내달라’ 는 등 문자를 보낸 사실을 인정했다. 박 전 시장이 피해자가 다른 부서로 옮긴 뒤에도  ‘남자를 알아야 시집을 갈 수 있다’ ‘섹스를 알려주겠다’고 문자를 보낸 것도 사실로 봤다. 그런데 경찰은 경찰관 46명을 투입해 5개월간 수사하고도 재판부만큼도 진실 규명을 못한 것이다. 경찰의 무능력 때문인가 무의지 때문인가.

경찰 발표가 나자 2차 가해가 더욱 기승부렸다. 강제 추행 방조 혐의로 고발된 전 서울시장 비서실장은 “고소인 측 주장이 거짓이나 억지라는 것이 확인됐다. 4년간 성폭력 주장의 진실성이 의심된다”고 했다. 서울시 행정부시장을 지낸 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경찰 수사 결과가 “사필귀정”이라고 했다. 전 서울시 인사기획 비서관은 피해자가 박 전 시장에게 쓴 편지 세 통을 페이스북에 공개했고, 한 대학 교수는 이 편지를 올리고 “어떻게 읽히시느냐. 4년간 지속적 성추행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한 여성이 쓴 글”이라고 했다. 적폐청산국민참여연대라는 친문(親文) 단체는 피해자를 무고 및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로 고발하겠다고까지 했다.

박원순 성추행 사건 발생 이후 정부 당국과 민주당 및 그 지지자들이 보인 언행은 피해자가 그토록 호소했던 ‘법의 보호’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사건에서 법의 보호란 무엇인가. 성추행이 사실인지, 서울시 간부들이 묵인 방조했는지, 성추행 고소 사실을 누가 외부에 유출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가하는 사람들을 단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 관계기관은 인권위 발표가 나오기 전까지 이런 의혹들에 대해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성과라면 서울북부지검이 고소 사실 외부 유출자로 남인순 민주당 의원을 지목한 정도다.  그러나 남 의원은 “나는 피소 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했고 유출한 바 없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 법은 ‘죽어가고’ 있었다. 오죽하면 피해자의 아버지, 어머니, 동생 등 가족까지 입장문을 냈을까. 가족들은 1월 18일 낸 200자 원고지 52매 분량의 입장문에서 “죽지못해 산 6개월”이라며 “책임 회피한 박원순 명예만 소중한가, 우린 죽어가는데…”라고 울부짖었다.

인권위 발표 나오자 분위기 반전···이낙연 "피해자에게 사과"

그런데 인권위 발표 이후 분위기가 싹 달라졌다. 우선 민주당 이낙연 대표가 ‘피해자’라는 말을 쓰며 정식으로 사과했다. 이 대표는 1월 27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희롱 등에 대한 직권조사 결과를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피해자와 가족들께 깊이 사과드린다. 국민 여러분께도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작년 7월 사건 발생 때는 ‘피해 를 호소하시는 고소인'이라는 낯선 표현을 썼다. 이 대표는 “피해자가 2차 피해 없이 일상을 회복하실 수 있도록 저희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고, 이런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관련법도 고치겠다고 했다. 얼마나 행동으로 옮길지는 두고볼 일이나, ‘피해 호소인’이라고 부르면서 민주당 지지자들의 2차 가해를 묵인하던 과거와는 달라진 태도다.

남인순 의원도 인권위 발표 다음날인 1월 26일 "국가인권위원회 직권조사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남 의원은 입장문을 통해 "피해자에게 `피해 호소인`이라고 지칭해 정치권이 피해자의 피해를 부정하는 듯한 오해와 불신을 낳게 했다"며 "저의 짧은 생각으로 피해자가 더 큰 상처를 입게 됐다. 다시 한번 피해자에게 깊이 사과드린다"고 했다. 이 밖에 2차 피해를 가하는 움직임도 크게 약화됐다. 인권위 발표로 성추행이 사실로 인정되자 더 이상 딴소리를 하기 어렵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인권위 발표는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피해자는 이제 최소한의 법의 보호를 받게 됐다. 인권위는 죽어가던 법을 그나마 살렸다. 인권위가 본래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국가인권위법 제3조는 “위원회는 그 권한에 속하는 업무를 독립하여 수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권력 눈치 보지 말고 소신껏 일하라는 말이다. 인권위가 정권과 정권 지지자들 눈치나 보려 했다면 이번과 같은 결과를 내놓지 못했을 것이다.

인권위, 국가 기관 제 역할 수행의 중요성 보여줘

이번 사례는 국가기관이 헌법과 법에 정해진 본래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특히 인권위처럼 감시하고 견제하는 기관이 제 역할을 다해야 권력과 그 지지자들의 만행을 막고 개인의 인권을 보호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감시하고 견제하는 기관에는 사법부, 감사원, 검찰도 있다. 이들 기관이 제 역할을 다하면 법과 상식과 정의는 저절로 지켜진다. 법과 상식과 정의가 지켜지고 존중되는 사회가 선진민주사회다.

권력이 법 위에 군림하는 걸 당연한 듯 여기는 한국 정치 풍토에서 인권위, 사법부, 감사원, 검찰 같은 국가 기관이 권력 눈치 보지 않고 제 역할을 다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탈원전 정책 결정 과정의 합법성 여부를 감사한 감사원, 정권 비리를 수사한 검찰, 친정권 인물들에게 양심껏 판결한 일부 판사들을 향해 지금 정권 핵심 인물들과 정권 지지자들은 온갖 핍박과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감사원장에게 “주인 행세 하지 말라”고 하고, 탄핵으로 판사들을 협박하고 있다. 검찰총장을 강제로 쫓아내려 했다.

인권위의 박원순 성추행 인정 발표는 이런 풍토에서 나온 것이라 더욱 돋보인다. 국가기관이 제 역할을 다한다는 게 무엇이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귀중한 사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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