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산책] 민주주의는 시끄럽고, 법치주의는 번거로울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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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자유 변호사
입력 : 2022-01-29 06:00
수정 : 2022-06-0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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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최자유 변호사]

처음 법학을 공부할 때는 법 이라는 언어는 대체 왜 이렇게 이상(?)한건가 했습니다. 용어는 왜 이리 난해한지, 체계는 왜 이리 복잡한지.. 덕치주의(德治主義)를 하는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논쟁이 오래 전에도 있었습니다. 지금에야 의견 대립이 있으면 말로 하고, 대립이 극단화되면 소리를 지르는 정도이지만 예전에는 칼을 뽑았습니다.

KBS 1에서 방영하는 '태종 이방원'을 즐겨보고 있습니다. 사극을 즐겨보는 저는 이방원의 시대를 다루는 용의 눈물, 대왕세종, 뿌리깊은 나무, 정도전을 모두 보았는데, '또방원'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진부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이방우, 이방과, 이방의, 이방간, 이방연 등 이성계와 신의왕후(神懿王后) 소생의 인물들을 모두 다루고, 결코 공손하게(恭) 선양(讓)하지 않은 공양왕(恭讓王)의 처절한 저항을 실감나게 묘사하고('정도전' 에서의 공양왕보다 더욱 강합니다.), 완성형 인물이 아닌 성장해가는 이방원을 그리는 ‘태종 이방원’은 지금까지의 사극과는 단연 다릅니다. 폐가입진(廢假立眞)으로 창왕(昌王)을 폐위하는데 앞장선 정몽주는 최소한 고려 왕조를 지키려 했으니 공양왕이 정몽주를 전폭적으로 신뢰해서 정도전, 조준, 남은, 윤소종 등 이성계를 지지하는 관료들을 제거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합니다. 최영, 변안열 등을 모두 제거한 이성계의 병권을 건드릴 수는 없었으나 최소한 조정 내에서 이성계의 세력을 몰아내서 균형을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으로 이어지는 무인 집권기처럼 왕실은 허울만 남더라도 고려 왕조를 유지한 채로 후일을 도모할 수는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제가 이 글을 투고하는게 1월 13일입니다. 지난 8일 공양왕은 공손하지 않게 퇴위하고 조선이 건국됩니다. 9일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농간으로 이성계의 막내 아들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고 이방원은 분노합니다. 이후 ‘태종 이방원’의 전개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일 것입니다. 정안군(靖安君)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戊寅定社)을 통해 이방석과 정도전을 제거하고,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이방간을 제거하고, 결국 이방원은 정종 이방과의 세자(세제가 아니라 세자였습니다.) 자격으로 양위를 받아 꿈에 그리던 왕위에 오릅니다. 드라마에서 유독 이방원과 대화가 많은 사람은 곧 죽는다는 법칙(?)에 따르면 신덕왕후가 15일 아니면 16일에 죽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태종 이방원은 '킬방원' 이라고도 불립니다. 사실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지만 개국공신 정도전, 남은을 죽이고, 이복동생인 이방번, 이방석을 죽이고,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를 죽여 처가를 멸문하고, 상왕 시절에도 ‘킬러’ 본능은 이어져 사돈인 심온을 죽인 임팩트가 강해서 '킬방원' 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 같습니다. 물론 ‘태조(왕건)를 모신 신하가 40명도 남지 않을 정도’로 죽인 고려 광종에 비하면 비교할 바도 되지 않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유학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었으며, 26세의 정몽주를 격살하여 고려의 마지막 대들보를 없애는 결단력을 갖추고 있었고, 백전무패의 무장 이성계가 태상왕이 되어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조사의의 난(趙思義ㅡ亂)을 진압하는 등 군사적인 소양도 갖추었습니다. 따뜻한 가슴을 가지기도 하였는데 1차 왕자의 난에서 죽인 정도전의 아들 정진을 복권하여 그는 세종 시절 형조판서까지 오릅니다. 2차 왕자의 난에서 칼을 겨눈 형제 이방간을 편하게 살 수 있게 해주기도 합니다. 이방원의 숙청은 신생 국가 조선에서 왕권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특히 심온은 체포되어 국문을 받으며 상왕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담담히 죽음을 맞이했다 합니다. 힘 없는 백성들에게는 관대했지만 유독 친족과 권신에게는 엄격했는데 그는 왕이 통치하는 국가를 만들고자 하였으니, 왕권을 위협하는 친족과 권신을 처단하여 그 체제를 튼튼하게 만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무엇보다도 태종 이방원의 가장 큰 업적은 왕권을 튼튼하게 하여 세종대왕의 치세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결과론적이란 의미는 태종도 도저히 세종이 그 정도의 성군이 될지는 몰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은 “모든 악업은 내가 지고 갈터이니, 주상은 부디 성군이 되시오.” 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태종 이방원’ 에서도 양위를 결정하며 세자에게 “성군이 되어라. 그리하면 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하지 못하면 나는 괴물이 될 것이다.” 라고 합니다. 이는 드라마의 각색이지만, 아마 실제로 태종은 세종에게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오늘날까지 태종이 사랑받고, 빛이 날 수 있는 것은 세종-문종으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 번영의 기반을 튼튼히 닦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태종 이방원의 결단은 세종대왕이란 전무후무한 성군을 낳았습니다. 태종의 업적이 어찌 세종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악업을 모두 지고 간 태종 덕분에 세종은 어느 권신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큰 뜻을 펼쳐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어리석은 백성이 뜻을 펴게 하였으며, 칠정산을 편찬하는 등 천문 기술을 발달시켜 조선의 하늘을 그렸으며, 측우기를 만들어 농사를 편리하게 하고, 4군과 6진을 개척하여 국방을 튼튼하게 하고, 집현전을 통해 최고의 학자들을 양성하는 등 이 글을 통해서 쓸 수 없을 정도의 업적을 남겨 조선시대는 물론 우리나라 전체 역사에 걸쳐 최고의 왕으로 추앙받고 광화문에서 오늘날까지 우리나라를 지켜주고 있습니다.

조선이 처음 건국될 때 부터 왕의 권한이 막강했던 것은 아닙니다.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은 재상총재제(宰相冢宰制)를 주장합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치전(治典) 총서(總序)에서 ‘치전은 총재가 관장하는 것이다.’(治典, 冢宰所掌也) 라고 하여 재상이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는 국왕을 상징적인 존재로 두는 입헌군주제의 원시적인 모형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1215년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the Great Charter of Freedoms)보다 늦기는 했지만, 왕의 권한을 제한한다는 생각은 혁신적 이었습니다.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판호조사(判戶曹事)·겸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겸의흥친군위절제사(兼義興親軍衛節制使)로 권력의 핵심이던 정도전은 자신의 꿈을 하나씩 실현시켜가며 재상총재제 등의 정책을 추진하지만, 왕을 허수아비로 만든다는 생각에 정안군 이방원과 종친들은 분노하고, 이성계의 아들들은 물론 이성계의 동생인 청해군(青海君) 이지란, 의안군(義安君) 이화, 이성계의 조카인 완산군(完山君) 이천우 등 사실상 이성계를 제외한 왕실 전체가 난을 일으켜 이성계가 와병 중인 틈을 타서 정도전의 목을 베게 됩니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은 조선의 설계도였습니다. 치전(治典)·부전(賦典)·예전(禮典)·정전(政典)·헌전(憲典)·공전(工典) 으로 구성되어 조선을 운영할 세부적인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패배함으로써 조선경국전이 시행되지는 못하였고, 태조 대에 경제육전(經濟六典), 태종 대에 속육전(續六典) 등이 제정되었으나 여러 한계로 인해 조선 사회를 통치하는 규칙으로 확고히 자리잡지는 못하였고, 성종 대에 이르러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될 때까지 관습법과 판례법에 의해 통치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왕의 권한은 법을 초월했습니다.

물론, 태종-세종-문종 시대는 애민정신을 갖춘 성군의 치세였으므로 굳이 성문법이 필요 없었을 수도 있으나 이는 지극히 우연한 일이었고, 행운이었습니다. 즉위하는 모든 국왕이 세종이라면 성문법도 필요 없고, 재상총재제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태종-세종-문종의 치세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세종과 문종이 안정시켜놓은 통치 시스템 덕분에 단종 초기에는 김종서와 황보인이 황표정사(黃票政事)를 통해 안정적으로 국정을 이끌었고, 단종이 그대로 성인이 되었다면 조선의 번영기는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재상총재제를 채택하지 않은 이상 왕이 국정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는 조선의 통치시스템에서 공식적으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대비도 아닌 재상이 국정을 운영하는 것은 분명 정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만일 재상총재제를 채택했다면 지극히 정상이었을 것이지만 말입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은 기습적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와 황보인을 살해하고, 정통성을 가진 단종이 폐위하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즉위하며, 번영하던 조선에 먹구름이 드리우게 됩니다. 강력한 왕권을 주장한 양녕대군이 수양대군을 지지했다는 것으로 보아 무인정사 시즌 2가 아닐까 합니다. 물론 정안군은 명분이 있었고, 종친의 지지를 받았으며, 정국을 신속히 안정시켰으나 수양대군에게는 명분도 없었고, 왕실 내부의 반발도 상당했기에 그대로 비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과연 세조 치세를 보아도 재상총재제가 필요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후 그나마 세조의 아들인 성종이 조선의 기틀을 다잡으며 흔들리는 조선을 안정시키게 됩니다. 다행히도 성종이라는 위대한 왕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이 다시 안정될 수 있었던 것이지, 성종이 폭군이었으면 조선 왕조가 과연 500년을 이어졌을지 모르겠습니다.

태종 이방원이 정도전에게 승리한 이래 조선은 전형적인 군강신약(君强臣弱)의 나라였습니다. 청나라의 강희제가 조선의 왕권이 약하다고 조롱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황제가 분노하면 10족을 멸할 수 있는 명나라와 청나라에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공자에 비견하여 송자(宋子)라고 불렸고, 재야에서 국정을 좌지우지 하던 송시열도 29살의 숙종이 결심을 하자 죽을 수 밖에 없었으며, 흥선대원군은 비변사를 혁파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켜 60년을 이어온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종결하였습니다. 고려 시대 목종이 권력자 김치양을 축출하기 위해 강조의 군대를 동원했어야 했고, 인종이 권력자 이자겸을 축출하기 위해 척준경의 군대를 동원했어야 하는 등 비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했어야 하는 것과 다르게 조선의 왕은 제도권 내에서 정당하게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조선이 500년의 시간 동안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고려 태조 왕건 이후 광종이 대숙청을 하여 왕권을 안정시켜서 고려는 500년을 이어졌지만, 후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은 무능했기에 나라를 잃었습니다. 만일 신검이 이방원같은 능력이 있었다면 후백제가 허망하게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태종 이후에 즉위한 임금이 연산군이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연산군은 세자 시절 특별히 자질이 나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위 초기에도 그럭저럭 통치했으며, 폭군의 모습은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 이후에나 나타났다고 합니다. 성종도 연산군이 폭주할 것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일, 태종이 권력을 사적으로 탐하였거나, 후계자를 잘못 선택했거나 두 가지 중 하나만 삐끗했어도 조선의 역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흘렀을 것이다. 장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을 폐위하지 않았다거나 충녕대군(忠寧大君)을 후계자로 선택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찌 되었을까요. 아무런 견제 세력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세습되는 군주가 현명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선대 군주가 영웅이라도 후대 군주가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열조 소열제(烈祖 昭烈帝) 유비와  회황제(懷皇帝) 유선이 가장 단적인 예시입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강력한 군주가 통치한다면 세종대왕이 등장할 수도 있지만, 연산군이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역사는 운에 맡길 수 없습니다. 예측 가능한 시스템에서 선출된 유능한 리더가 통치하는 체제는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만인 중 가장 뛰어난 역량을 가진 재상이 국정을 운영하고, 성문법인 조선경국전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를 설계하고자 한 정도전과 국왕이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옳다고 본 태종 이방원. 조선의 운명을 걸고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겨룬 결과 승자는 태종 이방원이었고, 조선은 오랜 시간 안정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청동기 시대 부족장이 등장한 이래 5천년 가량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그것이 최선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오늘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보편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시끄럽고, 법치주의는 번거롭습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채택하는 이상 우리는 태종도, 세종도, 문종도 다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산군을 피할 수 있습니다. 모든 통치자가 세종이라면 강력한 군주가 다스리는 국가가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통치자가 세종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시끄럽고 번거로운 것을 감수할 수 밖에 없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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