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국 칼럼]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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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로고스 대표)
입력 : 2019-11-03 09:00
수정 : 2019-11-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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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통망의 발달로 세계 어디든 쉽게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통신과 인터넷의 발달로 굳이 발로 뛰지 않더라도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도 실시간으로 통화할 수 있고 문자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온갖 뉴스나 정보도 순식간에 지구를 돌고 돌아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주제와 관심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지구촌 가족이니, 지구는 평평하다는 말이 실감나는 세상이 온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소통할 수 있는 여건이 옛날보다 훨씬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좁은 한반도에서는 왜 그리 사람들이 벽을 쌓고 살고 있을까? 분단된 남북이 빨리 하나가 되어야 할 텐데, 오히려 남쪽에서 다시 동서가 갈리고 세대가 갈리고 있다. 그리고 진보와 보수가 서로 조금씩 가까워져야 할 텐데, 오히려 등을 돌려 더욱 극우와 극좌로 향하고 있다. 허준은 <동의보감>에서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卽不痛 不通卽痛)’이라고 하였다. 통(通)하면 통증이 없고, 통하지 않으면 통증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지금 불통(不通)으로 인하여 심각한 통증이 있는 사회가 되었다 할 것이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가 소통이 원활한 사회가 될 것인가? 이동규 교수는 자신의 최근의 저서 <생각의 차이가 일류를 만든다>에서 소통의 가장 기본 기술은 적극적인 경청(傾聽)이라고 한다. 아예 경청은 듣는 것이 아니라, ‘두 귀로 설득하는 기술’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한 예를 들고 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현장에서 팀장들로 하여금 말수를 확 줄이고 대신 팀원들의 이야기를 무조건 경청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 결과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직원들도 몇 달이 지나면서부터 자신의 의견이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자 아이디어가 쏟아지며 엄청난 성과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언뜻 생각하면 듣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냐고 할 수 있으나, 많은 사람들이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기 말을 먼저 하려고 한다. 남의 말을 듣고 있는 중에도 머릿속에는 이에 대응하는 자기 말을 생각하느라고 남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기도 한다.

나 자신 오랜 법조 생활에서 남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 줄 실감한다. 판사로서 원, 피고 당사자 말을 듣거나, 변호사로서 의뢰인의 말을 듣다보면 중언부언하거나 사건의 쟁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장황한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판사 시절 아줌마들끼리 원, 피고가 되어 돈 문제로 싸우는 사건을 맡은 적이 있다. 여러 곗돈과 대여금이 복잡하게 얽혀있는데, 변호사가 없으니 제대로 정리된 서면과 증거도 못 내고 법정에서도 생각만 앞설 뿐 조리 있게 말을 못하고 횡설수설하였다. 이 아줌마들 말을 다 들어주다간 다음 사건 재판 진행을 제대로 못 하겠고... 하여 다음 기일에 이 사건을 그 날의 맨 마지막 사건으로 돌려 시간 구애를 받지 않고 충분히 얘기를 들어주었다. 의문 나는 것 물어보고 다시 한참 듣고,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서증(장부)을 펼쳐놓고 다시 한참 설명 듣고... 그렇게 한, 두 번 더 마지막 시간으로 재판기일을 잡아 설명을 듣고 증인을 신문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인사 이동으로 다른 법원으로 가는 바람에, 그 사건을 끝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법원으로 가고 난 지 얼마 후, 그 중 한 아주머니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내용인즉, ‘나로부터 판결을 받지 못해 아쉽지만, 자기는 판사가 자기 얘기를 끝까지 경청해준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판사가 그렇게 자기 얘기를 잘 들어주었기에 자기는 어떤 판결을 받더라도 승복하겠다.’는 것이었다. 경청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자기 주장만 강하게 떠드는 입만 난무하고 있지, 상대의 말을 잘 들으려는 귀는 닫혀있다. 이 불통의 시대를 소통의 시대로 옮겨가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안이 있겠지만, 이동규 교수 말마따나 우선 기본적으로 소통의 가장 기본 기술인 적극적인 경청(傾聽)을 실천하자. 그리하여 지금부터라도 말을 하고 싶어 들썩거리는 입을 제발 절반만이라도 닫고 귀를 열자. 그럼에도 말을 꼭 하고 싶다면? 이동규 교수는 이때도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옳은 말을 하더라도 기분 좋게 하라고 한다. 그럼 당할 자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교수는 ‘통섭(統攝)’의 ‘攝’을 보라며, ‘攝’에는 귀(耳)가 세 개나 붙어 있지 않느냐고 한다. 통섭으로 상이한 성격의 다양한 벽을 넘나들려면 무엇보다 자신과 다른 외부,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크게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디 우리 사회가 날카로운 비수만 뱉어내는 입은 닫히고 아름다운 귀만 열리는 그런 사회가 빨리 되기를 소망하고 소망해본다.
 

[사진=양승국 변호사, 법무법인 로고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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