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낭기의 관점]지혜로운 판결이란 무엇인가

  • '질서' 존중 친자 확인 판결 대 '정의' 추구 징용 배상 판결
  • 전자는 혈연 관계 진실보다 전통적 가족 가치 중시
  • 후자는 기존 한일 관계 유지보다 피해자 배상 중시
info
입력 : 2019-11-13 18:47
수정 : 2019-11-21 20:39
프린트
글자 크기 작게
글자 크기 크게
지난 10월 23일 친생자(친자녀) 확인 문제와 관련한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 유전자 검사 결과 자녀가 남편의 친생자가 아님이 밝혀졌더라도 일정 기간 내 소송을 제기하지 않으면 친생자로 봐야 한다는 판결이다. 앞서 작년 10월 30일에는 일본 기업에 대한 일제 강제 징용자의 손해 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판결이 있었다. 일본에 대한 한국과 한국민의 청구권을 포기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도 불구하고 강제 징용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살아 있다는 판결이다.

두 판결은 내용에선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판결과 사회 변화 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는 판결은 변화를 이끌어 가야 하는가 아니면 변화를 뒤따라 가야 하는가, 이끌어 가야 할 때는 언제이고 뒤따라 가야 할 때는 언제인가 하는 문제다.

◆변화를 이끄는 판결, 변화에 뒤처져 가는 판결

친생자 확인과 관련한 판결은 아내가 인공수정으로 남의 정자를 받아서 낳은 첫째 아이와 혼외 임신으로 출산한 둘째 아이에 대해 남편이 친생자가 아님을 확인해달라고 낸 소송에서 나왔다. 대법원은 인공 수정으로 낳은 첫째 아이에 대해 남편이 당초 인공 수정에 동의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걸 번복할 수는 없고 따라서 친생자가 아님을 확인해 달라는 소송을 낼 수 없다고 했다. 친생자로 여기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건 일반인도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아내가 혼외 임신한 둘째 아이였다. 유전자 검사 결과 둘째는 남편의 친자가 아님이 확인됐다. 이 경우에도 친생자로 추정할 것이냐 아니냐가 쟁점이었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당연히 친자로 추정하지 않는 게 옳을 것이다. 남편이 아내의 혼외 임신에 동의하지는 않았을 테니 자녀와 아버지의 유전자가 다른 사실이 확인됐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친생자로 볼 수 없다는 게 일반인들의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 판결은 달랐다.  아내가 혼외 임신으로 남편과 유전자가 다른  아이를 낳은 경우에도 그 자녀는 남편의 친생자로 추정된다고 했다.  따라서 2년 내에 소송을 내지 않은 이상 소송이 무효이고 친생자임을 부인할 수도 없다고  했다.  민법에는 친생자로 추정되는 경우와 아닌 경우에 따라 친생자가 아님을 확인해달라는 소송을 낼 수 있는 기간이 달리 규정돼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2년 내에 소송을 내야 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기간 제한 없이 언제든지 소송을 낼 수 있다. 친생자로 추정되느냐 아니냐는 이처럼 중요한 문제다.

대법, "아내 혼외 임신 아이도 남편 친자녀"

이 판결이 주목을 끈 이유는 대법원이 민법의 친생자 추정  규정을 유전자 감식 기술의 발전 같은 사회적 변화에 맞춰 달리 해석할 것이냐, 기존 판결과 똑같이 해석할 것이냐 하는 점 때문이었다. 민법 제844조에는 ‘아내가 혼인 중에 임신한 자녀는 남편의 자녀로 추정한다’고 돼 있다. 이를 친생자 추정의 원칙이라고 한다. 대법원은 1983년 이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 예외 사유로 딱 한 가지를 인정했다. ‘부부가 별거하는 등 아내가 남편의 아이를 임신할 수 없는 사정이 외관상 명백한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아내가 낳은 자식이 남편의 친자식으로 추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남편은 친자식이 아님을 안 지 2년이 지나서도 친자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해 달라는 소송을 낼 수 있다.

민법에 ‘아내가 혼인 중에 임신한 자녀는 남편의 자녀로 추정한다’는 규정과 ‘친생자로 추정될 경우 친생  부인(否認)의 소송은 2년 이내에 제기해야 한다’는 규정을 둔 이유는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다. 혼인 중 낳은 아이는 부부의 친자로 추정하되, 친자가 아님을 안 때는 2년 내에 소송을 내서 친자 관계가 아님을 조속히 확인하라는 것이다. 친자가 아님을 알고도 오랫동안 묵인했다가 나중에 문제 삼으면 그동안 유지돼온 가정의 평화가 한순간에 깨지고 자녀의 법적 지위도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유전자 검사 기술 발전 불구 36년전 판결  유지

과거에는 과학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친자 관계인지 아닌지를 명확히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시대에는 친생자 추정의 예외 사유를 '부부가 별거한 때'처럼 엄격히 제한하고 그 경우가 아닐 때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소송을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요즘은 유전자 검사 기술의 발전으로 친자 관계인지 아닌지를 언제든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유전자 검사 결과 친생자가 아님이 확인됐는데도 ‘아내가 혼인 중에 임신했다'는 이유만으로  친생자로 추정한다면 시대 변화에 맞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아무리 법적으로는 친자 관계라 해도 유전자가 달라 남남임이 확인되면 그 가정은 깨지기도 쉽다. 가정의 평화를 지킨다는 민법 규정의 취지가 살려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판결을 앞두고 대법원이 1983년 판결과는 다른 판결을 내리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있었다. 예컨대 친생자 추정의 예외 사유로 ‘유전자 검사 결과 친자 관계가 아님이 확인된 때’와 같은 경우를 추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부부가 따로 사는 경우’만을 친생 추정의 예외로 인정한 36년 전 판결을 그대로 유지했다. 대법원은 “민법에는 ‘아내가 혼인 중에 임신한 자녀를 남편의 자녀로 추정한다’고만 돼 있을 뿐”이라며 “따라서 혈연 관계 유무를 기준으로 친생자로 볼 것인지 아닌지를 정하는 것은 민법 규정의 문언(文言)에 어긋난다”고 밝혔다. 민법에 ‘혈연 관계냐 아니냐’가 아니라 ‘혼인 중에 임신했느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친생자 여부를 추정하게 돼 있으니 유전자가 다르더라도 혼인 중에 임신했다면 친생자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것이 가정의 평화를 지키려는 민법의 입법 취지에도 맞는다고 했다.

이 판결은 유전자 검사 기술의 발전이라는 사회 변화를  반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회 변화에 맞춰가거나 변화를 이끌어 가기보다 사회 변화에 뒤처져 가는 판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혈연 관계 확인이라는 진실이나 원칙은 다소 훼손된 반면에 가족의 보호라는 전통적 가치는 더 지켜지게 했다. 

징용 배상 판결,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정면 뒤집어

이에 비하면 작년 10월의 강제 징용 배상 판결은 사회 변화를 이끌어가는 판결이다. 이 판결은 2012년 5월 김능환 당시 대법관이 주심을 맡아서 내린 대법원 판결을 그대로 인정한 것이다. 2012년 판결은 여러 면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파격적인 판결이었다. 그 이전까지 하급심 판결 4건이 나왔지만 모두 강제 징용 배상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개인의 청구권도 포함돼 있어 그 협정으로 이미 개인 청구권 문제가 해결됐고, 손배배상 소송을 낼 수 있는 10년 시효도 지났다는 것 등이 주요 이유였다. 한국 정부의 입장도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은 제한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2012년 대법원은 하급심 논리와 정부 입장을 한꺼번에 뒤집었다. 강제 징용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고, 소멸 시효도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강제 징용은 불법인데 1965년 협정은 일제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었다. 소멸시효에 대해선 그동안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소송을 낼 사회적 여건이 되지 않아 소송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대법원은 징용 배상 판결을 내리면서 헌법 정신, 신의성실 원칙, 공공질서와 선량한 풍속, 반사회적 질서 같은 추상적인 원칙을 들었다. 친자 확인 소송 판결이 민법 규정을 문언 그대로 적용한 것과 달리, 강제 징용 판결은 민법 규정보다 이를 보충하는 일반적 원칙을 더 중시했다.

강제징용 판결로 한일 청구권 문제는 물론이고 한일관계는 판결 이전과 완전히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제 우리 사회와 정부는 일본 기업들로부터 강제 징용 피해자의 손해 배상을 받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개인 청구권 문제는 이미 끝난 것로 알고 있던 사회에서 그게 아니라 살아 있다고 보는 사회로 변하고 말았다. '피해자 배상'이라는 정의는 세워졌을지 몰라도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기반한 기존 질서는 통째로 무너지고 말았다.

작년 10월 강제 징용 배상 판결 때 대법관 2명은 반대 의견을 냈다. “한일 청구권 협정에 모든 청구권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는 표현이 있다”며 “청구권 협정을 무효로 할 것이 아니라면 좋든 싫든 그 문언과 내용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이어 “한국 정부는 지금이라도 피해를 입은 강제 징용자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했다. 두 대법관은 정의나 헌법 정신 같은 추상적 원칙보다 청구권 협정의 문언을 중시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했더라면 한일 청구권 협정을 지켜 한일관계도 파탄내지 않고, 강제 징용자에 대한 ‘피해 보상’이라는 정의도 그런대로 충족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기존 질서를 존중하면서 정의도 세울 수 있었다는 말이다.

'피해자 배상' 정의 세웠지만 기존 질서 무너뜨려

대법원의 두 판결을 사회 변화에 뒤처져 가는 판결과 사회 변화를 이끌어가는 판결이라는 관점에서 비교한 것은 어떤 판결이냐에 따라 판결의 역할을 보는 눈, 법관의 개인적 가치관이 판결에 미치는 영향, 나아가 판결이 전체 사회에 미치는 파급력과 그에 따른 긍정적, 부정적 영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변화를 이끌어 가는 판결은 판결의 역할을 '세상을 바꾸는 것'으로 본다. 변화를 뒤따라 가는 판결은 판결의 역할을 '세상을 지키는 것'으로 본다. 전자는 정의, 후자는 질서를 더 중시한다.

사회 변화에 뒤처져 가는 판결은 대개 추상적 원칙보다 관습과 전통이라는 실제적 측면을 중시한다. 그래야 질서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변화를 이끌어가는 판결은 추상적 원칙과 이념을 더 중시한다. 정의라는 명분을 살리는 데는 그런 원칙과 이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친생자 확인 관련 판결과 강제 징용자 배상 판결에서 본 그대로다.

사회 변화를 이끌어가는 판결엔 법관 개인의 가치관이 개입할 가능성이 크다. 변화는 현상을 타파하는 것이고 그러자면 기존의 통념, 기존의 논리, 엄격한 법 원칙과 규정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2012년 강제 징용 배상 판결의 주심을 맡았던 김능환 전 대법관은 주위 사람들에게 “건국하는 심정으로 판결문을 썼다”고 말했다고 한다. ‘건국하는 심정’이라면 정의와 애국심 같은 추상적 원칙과 이념에 의존하게 된다. 정의와 애국심이 무엇인지는 법관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고, 따라서 법관 개인의 가치관이 크게 개입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칫하면 ‘튀는 판결’이 될 수 있다.

'질서'와 '정의' 조화와 균형 어떻게 이룰 것인가

사회 변화를 이끌어가는 판결은  큰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올 수도 있다. 강제 징용 배상 판결이 한일관계와 국내 여론의 분열에 미친 영향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판결대로 하려면 한일 관계를 풀기는 어렵다. 한일 관계 해법을 놓고 양쪽으로 갈라진 국내 여론을 통합하기도 어렵다. 반면에 사회 변화를 뒤따라 가는 판결은 지나치게 시대착오적인 판결이 아닌 이상 사회에 미치는 충격과 부정적 영향이 그리 크지 않다.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판결이기 때문이다. 친생자 확인  판결에서 보듯  진실이나 원칙은 다소 훼손되더라도 질서와 전통, 관습은 지켜질 수 있다. 

2500년 전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국가의 역할을 안정성과 공정성의 동시 추구라고 했다. 안정성은 질서, 공정성은 정의를 말한다. 질서는 현상 유지, 정의는 현상 타파를 추구한다. 질서만 강조하면 정의가 무너지기 쉽고, 정의만 추구하면 질서가 깨지기 쉽다. 투키디데스는 질서와 정의의 조화와 균형를 이루는 게 지혜임을 강조한 것이다. 판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사회 변화에 뒤처져 가는 판결로 기존 질서를 유지해야 할 때도 있고, 사회 변화를 이끌어 가는 판결로 정의를 추구해야 할 때도 있다. 문제는 어떤 사안에서 질서를 더 중시하고 어떤 사안에서 정의를 더 중시할 것인가이다.
그 판단을 잘하는 게 지혜일 것이다. 친자 확인 판결과 강제 징용 판결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지혜로운 판결일까.

김낭기 고문[남궁진웅 기자, timeid@ajunews.com]













 
후원계좌안내
입금은행 : 신한은행
예금주 : 주식회사 아주로앤피
계좌번호 : 140-013-521460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