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국 칼럼] ​손해 좀 보면 어떠한가?

천국은 바로 옆에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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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나 검찰 앞을 지나다보면 늘 벽보나 피켓 들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된다. 아니 법원, 검찰 뿐만 아니라 국회, 구청, 국방부, 방송국 등 민원이 있는 곳이거나 자기 주장을 펼치려고 하는 곳에서는 대개 이런 벽보나 피켓을 보게 된다. 그뿐인가? 재개발 사업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벽보와 펼침막이 등장하고, 동네에 장애인 시설이나 교도소 등 소위 혐오시설이 들어올라치면 우리 동네에는 안 된다며 피켓 든 주민들이 나타나 시위를 벌인다. 그리고 벽보나 펼침막을 보다보면, 게 중에는 점잖게 호소하는 글도 있지만 대개는 섬뜩한 구호나 원색적인 비난의 글이다. 읽다보면 섬뜩함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왜 이리 각박할까? 조금 양보하고 살 수는 없을까? 그리고 자기 주장을 펼치더라도 좀 여유를 가지고 펼칠 수는 없는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삶의 여유가 없어지고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한다. 재판에서 조정 절차를 진행하다보면 얼마 안 되는 금액의 차이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며 조정이 결렬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또 어느 법원, 검찰이나 소송에 한 맺힌 듯 소송이나 고소, 고발을 남발하는 사람이 있다. 오죽하면 엄청나게 소송을 남발하는 사람 때문에 사법 통계가 왜곡되는 경우도 생길까? 예전에 내가 재판했던 한 사건이 생각난다. 70대 노인이 피고인인 형사사건인데, 민사재판에서 자기가 진 것이 증인의 위증 때문이라며 증인을 위증죄로 고소하였다가 거꾸로 무고죄로 기소된 사건이다. 그 피고인은 이미 그 증인을 위증으로 고소했다가 무고가 인정되어 벌금을 받았고, 또 고소했다가 집행유예를 받았고 그러고도 또 고소했다가 다시 무고죄로 기소된 것이었다.

재판을 해보니 유죄는 피할 수 없는 것, 그리고 똑 같은 증인에 대해 계속 무고를 하여 벌금, 집행유예를 차례로 받았으며, 또 집행유예 기간 중에 또 무고를 하였으니 이번에는 용서해줄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법정구속은 하지 않은 채 실형만 선고하였다. 그러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한 마디 했다. “피고인은 지금 70 중반입니다. 70 중반이면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을 비우고 인생을 정리할 나이가 아닙니까? 민사소송에서 패소한 그 억울한 심정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억울하다고 언제까지 증인을 계속 고소하실 겁니까? 이제 그 분노와 집착을 좀 내려놓으시지요. 재산을 저승까지 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 손해 좀 보면 어떻습니까?”나는 계속하여 피고인이 집착을 내려놓으면 항소심에서는 선처가 있을 거라는 얘기도 하려고 하는데, 피고인은 화를 내며 그대로 법정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나와 검사를 고소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화가 나기보다는 인생 말년에도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 인생이 가여웠다.

손해 좀 보면 어떠한가? 욕심과 분노의 집착이 자기 삶을 갉아먹고 이웃과의 관계를 황폐화시키는 것보다는 좀 손해를 보더라도 이를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희망을 맞이하는 것이 더 낫지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너를 송사(訟事)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고 하셨다(마태 5:40). 왜 그러셨겠는가? 잘잘못을 떠나 송사에 말려들면 욕심과 분노, 미움 속에서 살아야 하니, 그 자체가 이미 지옥인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그런 지옥 속에서 삶을 갈아먹느니 아예 겉옷까지도 주어버리라고 하신 것이 아닐까? 재판을 하다보면 친한 친구가 원수가 되어 싸우고, 형제들 간에 심지어는 부모 자식 간에도 상대방을 잡아먹을 듯이 싸우는 경우도 보게 된다. 그게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마음 한 번 바꾸면 천국은 바로 옆에 있다. 겉옷까지 훌훌 벗어주고 바로 옆의 천국으로 들어가자.
 

[사진=양승국 변호사, 법무법인 로고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