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국 칼럼] ​ 유연의 리더 서애 류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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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그렇다면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가볍게 제압하고 서해로 올라와, 육지에서 파죽지세로 올라오는 일본 육군과 연합하여 조선을 완전 점령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이순신 장군이 전쟁 발발 14개월 전에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것은 조선의 복이었다고 말하여도 과장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순신을 그 자리에 앉히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이가 누구인가? 바로 서애 류성룡이다. 서애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순신이 품계를 몇 단계 건너뛰는 파격적 승진으로 그 자리에 갈 수 있도록 힘을 썼다. 그러므로 인물을 알아보고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필요한 자리에 이순신을 앉힐 수 있도록 한 것만으로도 서애의 큰 공이다. 뿐만 아니라 서애는 전쟁이 끝난 후 참혹한 전란에 국토가 유린되고 백성이 어육(魚肉)이 된 것에 뼈저린 반성을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일념 하에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징비록은 국보 제132호로 지정될 정도로 우리에게는 소중한 기록이므로, 이런 기록을 남겼다는 것 또한 서애의 공이다.

‘서애 류성룡’ 하면 사람들이 먼저 떠올리는 것이 이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애에게 좀 더 배워야 할 것은 서애의 유연한 리더십이다. 이순신이라는 꼭 필요한 인물을 파격적으로 품계를 올려 꼭 필요한 자리에 앉힐 수 있게 한 것도 서애가 발휘한 유연한 리더십의 일부분일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양반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할 때에 서애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기존 제도를 유연하게 변용할 줄 알았다. 이를테면 전시 개병제를 도입하여 군역에서 제외되어 있던 양반이나 천민 모두 병역 의무를 지게 할 뿐만 아니라, 천민들은 면천(免賤)에 더하여 전공을 세우면 벼슬까지도 약속하였다. 더하여 공물(貢物)과 호세(戶稅)를 토지세로 전환하여 양민의 조세부담을 완화시키는 수미법(收米法)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명군이 평양성 탈환에 사용한 병법을 조선군에 보급시켰으며 심지어는 적국인 일본의 전술, 전법, 진법(陣法) 등도 적극적으로 배우려고 하였다. 서애가 고안한 부교(浮橋)는 미 육사에서도 군사전술 연구주제로 채택하였을 정도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허약한 국력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그 동안 천시하였던 상업을 장려하고, 국영 수익사업으로 염업을 장려하였으며 광산을 적극 개발하였다. 그래서 실학 사상의 뿌리를 서애까지 끌어올리기도 한다. 다음과 같은 서애의 말에서 서애의 유연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갑자기 긴급한 변란을 만나면, 평상시와는 다른 행동거지를 취하여 정세를 변동시키고 시국을 구제할 계책을 마련하지 않고서, 반드시 말하기를 “옛날부터 내려오는 습관을 변경할 수가 없으며, 여러 사람의 뜻을 어길 수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이것은 마치 쌀밥과 고기 반찬을 먹고서 병을 고치려 하고, 나막신을 신고서 큰 강을 건너려는 것과도 같습니다.

서애는 이러한 유연한 생각과 행동으로 국난을 이겨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조선의 양반들은 다시는 이런 변란을 당하지 않도록 어떻게 국가를 개조하고 백성들을 구휼한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는 전란으로 흐트러진 자신들의 기득권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에만 급급하였다. 그렇기에 서애가 의욕적으로 장려한 국영 염업은 기득권자들의 반발로 이미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벽에 부딪쳤으며, 전쟁이 끝나자 서애는 전쟁을 일찍 종결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나라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쫓겨났다. 그리고 선조는 정곤수를 조석으로 왕을 잘 모셨다는 이유만으로 1등 공신에 봉하고 조선 수군을 말아먹은 원균도 1등 공신으로 봉하면서도, 누가 보더라도 이들보다 더욱 공이 있는 서애는 겨우 2등 공신에 봉하였다. 그러면서 서애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쓴 징비록은 잊혀졌다. 오히려 적국이었던 일본이 징비록의 가치를 알아보고 1695년 <조선징비록>이란 제목으로 징비록을 출간한 이래, 최소 30여종 이상이 발간되면서 징비록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조선에서는 개혁군주 정조만이 징비록의 가치를 알아보았다고나 할까? 이러니 조선은 다시 30년 만에 국토가 청의 말발굽에 유린당하고 끝내는 1910년 일본에 먹힌 반면, 징비록에서 지혜를 얻은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자가 되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오늘날 대한민국의 상황은 어떤가? 대한민국은 지금 자기와 다른 생각은 틀린 생각이라는 흑백논리, 다른 진영의 주장은 무조건 틀린 것이며 내가 속한 진영의 주장은 무조건 옳다는 진영논리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니 21대 국회가 문을 열었지만 시작부터 겨우 원(院) 구성하는 것조차 합의하지 못 한 것 아닌가? 혹자는 지금의 대한민국 상황이 구한말 조선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말까지 한다. 이럴 때 우리에게 꼭 필요한 리더십이 서애의 유연한 리더십이 아닐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진정 나라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편협한 논리에 구애받지 않던 서애의 리더십이 오늘날 꼭 필요한 리더십이 아니냐는 말이다. 작년 12. 2. 서애학회가 창립되었다. “우리는 서애 시대를 탐지하고 서애라는 인물을 조명하면 할수록 오늘날 우리시대가 밝혀집니다. 그 시대 그 인물들에 천착하면 할수록 지금 우리 현실이 꿰뚫어 보입니다. 우리 사회 특유의 내부갈등, 적전분열, 진영구축에, 다른 사회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화된 역시 우리사회 특유의 원한, 분노, 한풀이가 모두 선대의 데자뷔라 해도 이의를 달기 어려운, 그 시대의 그것이 지금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서애학회 창립 발기문의 일부분이다. 유연한 리더 서애를 연구하는 학회가 이제야 창립되었다고 하니, ‘이제야 서애를 연구하는 학회가 창립되었단 말인가?’ 하는 만시지탄을 발하게 되기도 한다. 이제 서애학회의 출범을 기반으로 우리 시대에 서애 정신이 널리 퍼지고 실천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글을 적어본다.

※ 서애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서애학회의 학회지 <서애연구> 창간호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진=양승국 변호사, 법무법인 로고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