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국 칼럼] 박창훈 대 박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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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양승국 변호사, 법무법인 로고스 제공]

친한 선배 딸이 서점을 냈다길래 책 몇 권을 주문했더니, 덤으로 <박물관 보는 법>이란 책을 얹혀 보내왔다. 황윤이라는 박물관 마니아가 쓴 책인데, 우리나라 근대 박물관 역사와 수집가들의 유물 수집에 얽힌 이야기, 오늘날 박물관의 이모저모 등에 대해 얘기하는 책이다. 그런데 일제 시대 수집가 중 박창훈과 박병래에 대한 이야기가 내 눈길을 끈다. 둘 다 의사로서 출발하여 유물 수집에도 일가견을 이루었지만 서로 대조적인 삶을 살았다.

박창훈은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시험 및 보통문관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였으며, 1918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거쳐 총독부 관비 장학생으로 일본 교토제국대학에 유학까지 갔다온 수재였다. 그리고 경성의학전문학교 조교수로 근무하다가 교토 제국대학에서 박사 학위도 취득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항문외과 개인병원을 개업하자, 조선인, 일본인 할 것 없이 그에게 진료를 받으려고 줄을 섰다고 한다. 한편 박병래는 박창훈의 의대 후배로 1924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로 활동하였다.

의사로서의 명성은 선배인 박창훈이 더 화려하다고 하겠다. 박창훈은 그러한 명성으로 1941년에 국민총력조선연맹에 평의원으로, 또 조선임전보국단에는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적극적인 친일의 길로 나섰다. 그리하여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함락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충성스러운 황군의 혁혁한 전과에 감격하여 대동아 공영권의 기초가 확고부동해진 것을 충심으로 기뻐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반하여 천주교 신자였던 박병래는 가난한 서민을 위해 의술을 펼치기로 결심하였으며, 그런 신념에 따라 1936년에 천주교 서울 대교구와 함께 성모 병원을 차렸다고 한다. 성모 병원은 훗날 가톨릭대학교 의학부 부속병원이 된다. 이렇게 같은 의사로 출발하여 박창훈은 주로 가진 자를 위한 의술을 펼치고 나아가 적극적인 친일의사가 되었음에 반하여, 박병래는 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의술을 펼치는 의사가 되었다.

의사로서 성공한 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유물 수집에도 뛰어든다. 여기서도 그들이 의사로서 다른 삶을 살았듯이, 유물 수집가로서도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박창훈은 유물 수집으로 모은 573점의 소장품 전부를 1940~1941년 무렵 두 차례에 걸쳐 경성미술구락부에 경매로 내놓아 전부 처분하였다. 당시 기와집 한 채가 1,000~2,000원 하던 때에 그의 소장품들은 4,000~7,000원의 고액에 낙찰되었다니, 그가 소장품을 전부 처분하여 벌어들인 돈이 얼마나 되었을까? 그런데 그가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소장품들을 왜 그렇게 처분해버렸을까? 그는 자녀 교육에 부모 노릇을 하고 싶어서였다고 하지만, 그는 굳이 소장품을 처분하지 않더라도 자녀들에게 풍족한 교육을 시켜줄 재력이 있었을 것이다. 처분한 실제 동기는 따로 있었다. 일본이 패망하면 소장품의 가격이 폭락할 것을 예견한 것이다. 실제로 일본이 패전하자 고미술품 경매 시장은 전성기 매매가의 20% 이하로 추락하였다.

이에 반하여 박병래는 평생을 바쳐 모은 문화재 362점 전부를 죽기 얼마 전인 1974년 5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특히 박병래는 일제 시대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조선백자의 가치를 알아보고 이를 꾸준히 수집하고 <백자에의 향수>라는 책도 출간하였다. 박창훈이 단순히 치부의 수단으로 문화재를 수집하였다면, 박병래는 진정으로 문화재를 사랑하여 수집한 것이다. 그렇기에 박창훈은 수집한 문화재의 가격이 폭락할 것 같으니까 처분하여 많은 현금을 확보하였지만, 박병래는 그대로 소중히 돌보고 간직하다가 죽기 전에 아무 조건 없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그는 이런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도 받았다.

한편 해방 후에도 박창훈은 이렇게 치부한 돈으로 자신의 친일경력을 감추고 서울대 약학대학과 치과대학, 경기중학교 등의 후원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뽐내었지만,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 피난길에서 54세로 목숨을 다하였다. 이에 반해 박병래는 한국전쟁 당시 가톨릭 의료 봉사단을 조직하여 진료 활동을 펼쳤고, 공군 군의관으로 입대하여 1956년까지 전선에 근무하였다. 그리고 제대 후 성모병원장을 하다가 성 루가 병원을 개원하여 꾸준히 의술 활동을 펼쳤으며, 프란체스코 성인의 수도 정신에 감명을 받아 프란치스코 재속 형제회에 입회하기도 하였다.

같은 의사요, 같은 유물 수집가였지만 누가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았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박창훈이 수집한 유물을 박병래처럼 공공의 이익을 위해 국가에 기증할 수는 없었을까? 이미 먹고 살기에 충분한 재산이 있던 그가 굳이 수집 유물을 전부 처분하여 재물을 더욱 쌓아올릴 필요가 있었을까? 비슷한 길을 걸었지만 서로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준 두 사람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 살았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는가?’ 하며, 내 자신을 다시 돌아보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