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영업비밀 침해사건이 발생했다는 기사가 빈번하게 보도되고 있다. 최근 보도된, 국내 최대 반도체 회사의 전 임직원이 위 회사의 공정 자료를 빼돌려 중국에 이른바 ‘복제 공장’을 지으려 했다는 기사는 우리 국민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보도에 의하면 위 사건의 침해자는 중국 자본을 몇 천억 원이나 끌어와 업체를 설립했고, 대만의 전자업체로부터 8조 원 대의 투자를 약속 받아 해외에 반도체 회사를 설립하는 등 너무도 대담한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간 몇몇 개별적인 기술 자료들이 유출됐다는 기사가 보도된 적은 있었으나 영업비밀 유출자가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 받아 반도체 공장까지 설립하려 했다는 사건은 필자도 들어 본 적이 없다.
특히 최근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마당에, 만일 위 사건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우리의 반도체 기술 상당수가 중국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가슴을 쓸어 내릴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위와 같은 사건들이 단발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최근 발생하고 있는 영업비밀 사건들은 과거와는 다른 양상으로 벌어지고 있다. 국내 기업들 사이의 과도한 경쟁이 기폭제가 돼 사건이 발생하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분쟁이 국제적으로 번지고 있고, 특히 우리 기업들이 피해의 당사자가 되는 사건들이 속속 보고되고 있다.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추진 중인 KF-21 전투기에 관한 기술을 한 연구원이 USB에 담아 빼내려다 적발됐다는 사건은 바로 작년에 벌어진 일이다. 우리나라의 첨단 의료 로봇기술을 중국으로 빼돌린 사건도 최근 발생한 바 있다.
특히 위 두 사건이 모두 외국인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KF-21 전투기에 관한 자료 4000건 이상을 가지고 나가려다 적발된 사람은 인도네시아 국적 파견 연구원이었고, 로봇기술을 빼돌린 사람은 중국 국적의 연구원이었다.
우리나라는 반도체, 2차전지, 디스플레이, 로봇, 화학, 조선, 바이오, 의료, 방위산업 등 거의 모든 산업 분야가 고르게 성장한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국가로서, 이제는 기술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사실은 이제 우리 기업들이 해외의 다른 기업으로부터 기술탈취의 대상 또는 타켓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증가하고 있는 위와 같은 사건들이 이러한 점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행히도 우리 정부와 국회는 이러한 문제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올해 1월 국회는 영업비밀 침해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을 현재 3배에서 5배의 범위까지 강화하는 정부의 부정경쟁방지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전세계적으로도 가장 높은 수준의 징벌적 손해배상이다. 또한 부정경쟁방지법은 영업비밀로 인정받기 위한 비밀관리성 요건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계속 개정되고 있다.
다만, 이러한 법의 개정만으로 영업비밀 유출행위가 감소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우리나라에서 민사소송만을 제기해 상대방의 영업비밀 침해를 입증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 법제상으로는 미국의 디스커버리와 같은 제도가 없기 때문에, 민사소송 절차 내에서 증거를 확보할 수 있는 길은 다소 요원하다. 상대방의 침해행위를 입증하기 어려우므로, 징벌적 손해배상 규정이 강화된다고 해도 그 의미는 반감될 수 있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실무적으로 대부분의 영업비밀 사건은 형사 고소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형사사건에서도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고소인으로서는 압수수색 전에는 대부분의 증거를 직접 수집해야 하는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고, 압수수색이 이루어지더라도 수사절차 내에서는 압수물을 보고 분석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최근 수사기간의 역량이 상당히 강화됐지만, 영업비밀 대부분은 최신 기술로서 워낙 전문성이 높다 보니 설령 공학박사라고 해도 다른 분야의 기술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경쟁사의 영업비밀을 취득해 사용하는 경우 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침해자의 영업비밀 사용행위를 모두 밝혀낸다는 것은 상당히 큰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가 논의되고 있다.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된다면 영업비밀 침해사실을 입증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고, 이는 종국적으로 국가경쟁력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위 제도의 도입과 무관하게 우리 기업으로서는 영업비밀 침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대한 예방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영업비밀 침해행위는 그나마 회사의 통제가 가능한 내부자, 즉 재직 중인 임직원이나 퇴직자에 의해 발생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적극적인 교육 등을 통해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내부자에 대한 통제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내부자들이 영업비밀 침해에 가담한 이유는 회사의 불합리한 처우 또는 성과에 비해 턱없이 낮은 연봉 등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보기에 따라서는 돌아가는 길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기업들이 임직원들, 특히 중요 연구 개발자들에 대해 능력에 걸맞는 처우를 하는 것이 영업비밀 침해로 인한 손해를 막기 위한 근본적인 대비책이자 지름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디스커버리(증거개시제): 미국에서만 운용 중인 특허 소송 관련 제도. 분쟁 당사자인 양쪽 회사가 상대방에 증거자료를 요청할 수 있는 제도다. 상대 자료 요청을 거부하면 재판에서 패소할 정도로 결정타로 작용하므로 사실상 거절하기 어렵다. 2012년 미국 애플이 삼성을 상대로 스마트폰 특허 소송을 제기하면서 디스커버리를 적극적으로 구사해 승소한 바 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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